#2. 연쇄 추락 주의보
- 1화: https://mmangwool.tistory.com/entry/a-bit-of-freaks-%EB%B0%95%EC%A0%9C%EA%B0%80-%EB%90%9C-%EA%B3%A0%EC%96%91%EC%9D%B4
- 전편을 읽지 않아도 내용 이해에 무리는 없지만 전편과 배경 설정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 자세한 묘사는 없으나 모브캐의 자살을 연상시키는 내용이 있으니 주의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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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는 늦은 오후, 거리는 한적하다. 온종일 쏟아지던 비는 해가 기울 무렵이 돼서야 잦아들었다. 우산을 쓰기엔 안개에 가까운, 쓰지 않기엔 옷이 젖어 드는 게 느껴지는 물방울을 기꺼이 맞으며 테스카틀리포카는 거리를 거닐었다. 남미 이문대와 믹틀람파의 안개에 비하면 이 정도 습기는 그에게 귀여운 수준이다. 가지런히 정리된 검은색 장우산을 박자에 맞춰 흔들며 불어내는 휘파람은 회색빛 하늘에 어울리지 않는 경쾌한 곡조다. 선율은 점차 가닥을 잡아가며 쇼스타코비치의 모음곡으로 이어지고 발걸음도 그에 박자를 맞춰간다.
오늘 테스카틀리포카는 상당히 기분이 좋았다. 오랜만에 찾아온 대관식의 날, 그는 웬일로 혼자 일을 치르고 오겠다고 하며 길을 나섰다. 당연한 듯이 나갈 채비를 하던 데이비트는 의외라고 여겼지만 실은 그의 목적이 오늘의 식사 당번을 넘기기 위해서라는 것을 안 뒤에는 납득하고 말았다. 예정된 오늘의 메뉴는 스테이크였고, 그는 한자리에 가만히 서서 고기가 구워지는 걸 보고 있어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말인즉슨 식사 때가 되어서야 돌아오겠다는 뜻이다. 아마 데이비트가 마리네이드를 끝냈을 즈음 현관문을 열 것이다.
그리하여 홀로 파견원을 마주한 테스카틀리포카는 임무가 무사히 완료되었음을 통보받은 것과 동시에 당분간은 의뢰가 들어갈 일이 없으니 편히 지내도 된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에게 칼데아로부터의 의뢰는 그다지 재밌는 것이 되지 못했다. 평범한 인간인 척 지낼 수 있도록 그의 신분을 보장해주는 소속 기관인 이상 최소한의 의무는 지키고 있었으나 주어지는 의뢰는 대부분 탐색하고 수집하는 것이다. 이런 분야는 데이비트의 전문이지 테스카틀리포카의 취향에는 맞지 않는다. 그런 지루한 일에서 당분간 해방이라니, 그로선 이보다 기쁠 수 없었다.
의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시간을 때우기 위해 들른 단골 가게에서 그는 드물게도 포커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는 새로 생긴 지인들에게서 당당하게 판돈을 뜯어낸 테스카틀리포카는 지금이라면 누가 갑자기 얼굴에 총구를 겨눠도 웃으며 받아줄 의향이 있었다. 물론 신에게 도전한 이상 목숨이 붙어 있진 못하겠지만.
이대로 집에 돌아가서 그의 귀염성 없는 동거인과 근사한 저녁 식사로 마무리하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하루가 될 것이었다. 정당하게 얻은 휴가에 무엇을 할지 계획까지 세운다면 더욱더 좋을 것이다. 분명 그럴 예정이었다.
테스카틀리포카의 걸음을 붙잡은 것은 어느 골목이었다.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지저분하고 어두운 골목. 안쪽 깊숙이 들어가면 온갖 약물을 남용하는 무리와 마주칠 법한 그런 골목이었다. 테스카틀리포카가 멈춰 선 것은 불량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현대인으로서 살아가고 있다 해도 그는 마술적인 힘을 지닌 신령이다. 마술과 연관된 것을 접하면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만다. 문제의 골목에서 느껴지는 것은 바로 그런 기운이었다. 더불어 그 기운은 ‘좋지 못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선악의 개념을 중시하지 않지만, 이는 세계 전체를 기준으로 두고 보았을 때 사사로운 것이기 때문일 뿐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을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골목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세계의 질서 그 자체를 흩트릴 수 있는 것이었다. 관위 자격을 가진 자로서 모른 체할 수 없었던 그는 사악한 기운의 근원지를 파악하기 위해 골목으로 발을 들였다.
***
“……결국 저질렀구나.”
“뭐래는 거야, 난 아무 잘못 없다고!”
데이비트 젬 보이드는 면회를 위해 유치장 앞에 서 있었다. 시간은 지금으로부터 약 20분 거슬러 올라간다.
홀로 다녀오겠다는 테스카틀리포카를 배웅한 뒤, 데이비트는 올리브유를 곁들인 마리네이드를 하고 2시간짜리 영화를 보면서 적절하게 밑간이 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영화가 클라이맥스를 향해 가고 있을 무렵, 영화에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의아하게 여기던 데이비트는 그것이 영화에서 나온 소리가 아니라 현실의 전화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테스카틀리포카로부터의 전화가 아니면 벨이 울릴 일 없는 자신의 핸드폰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핸드폰 화면에 떠 있는 번호는 데이비트로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 지역의 번호인 것은 확실하나 출처를 알 수 없는 번호에 온갖 가능성을 떠올리며 받은 전화 너머에서는 역시 처음 듣는 목소리가 들렸고, 자신이 형사라고 밝힌 목소리는 집에서는 조금 거리가 있을 경찰서로 와달라고 말했다.
데이비트는 극히 일부의 사실만으로도 상황을 추측할 수 있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결정적인 정보를 얻었을 때의 일이다. 도무지 이 상황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해내지 못한 채 데이비트는 준비해둔 식사 재료를 냉장고로 옮겨둔 뒤 집을 나섰다. 그리고 경찰서에 도착하여 안내를 받아 들어간 유치장에서, 그는 쇠창살 너머로 보이는 동거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건데.”
“골목에서 좋지 못한 게 느껴지길래 상황을 보러 들어갔다. 그랬더니 웬 남자가 죽어 있었다. 그래서 신고를 했다. 그리고 잡혔다. 끝이야.”
“그럼 누가 봐도 네가 범인이군.”
“야!!!!!!”
아마도 그날 미국 시내의 몇 가정은 난데없는 정전을 겪었을 것이다. 정전의 원인이 현대에서 살아가는 어느 신의 노여움 때문이라는 것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채, 마른하늘에 날벼락—비록 비가 내리긴 했지만— 정도로 취급된 작은 해프닝이다.
“농담은 정도껏 해라.”
“미안하다. 상황이 꽤 재밌어서 그만.”
“난 재미 없다고…….”
테스카틀리포카는 의외로 정말 지쳤다는 반응을 보였다. 결백을 증명하려 해도 마땅한 증인도 없고, 분명 신분은 있으나 어째 수상하기 짝이 없는 내용에 나름대로 골치를 썩인 모양이다. 아무리 칼데아를 통한 신분 조작이었다고 해도 범죄에 연루되는 상황까지 고려하지는 않았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건은 둘째 치더라도 신분에 관해서는 잘못하면 데이비트까지 의심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자신을 경찰서로 부른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하던 데이비트는 두꺼운 파일철을 들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남성과 눈이 마주쳤다.
“어디 보자……. 댁이 미스터 블랙의 보호자 되십니까?”
“아… 예. 데이비트 젬 보이드라고 합니다.”
인간으로서 신분을 만든다면 그 이름 또한 인간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테스카틀리포카 같은 누가 봐도 범상치 않은 이름을 본명으로 대고 살기란 어려운 사회다. 그래서 정해진 이름의 어원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으며 성의 없기 짝이 없는 작명이었지만 다행히도 아직 이름으로 트집이 잡힌 적은 없다.
목소리로 보아 데이비트를 보호자라고 부른 남성은 전화를 걸어온 형사인 듯했다. 설마 신의 보호자가 되는 날이 올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한 데이비트는 잠시 대답에 뜸을 들이고 말았지만, 형사가 그를 의심하는 눈치는 없었다. 형사는 영 내키지 않는다는 듯 머리를 몇 번 긁더니 테스카틀리포카와 데이비트를 번갈아 보고 말을 이었다.
“미심쩍은 점이 남아있긴 하지만 알리바이도 확실하고… 현재로선 더 구속할 명분이 없어서 절차가 끝나는 대로 석방할 예정입니다. 다만 조사가 진행되는 것에 따라 참고인으로서 소환될 수 있으니 그땐 명령에 따라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명심해두죠.”
형사가 내민 것은 보호자 확인 서명란이었다. 데이비트를 이곳까지 부른 것은 이것 때문인 듯했다. 서명을 받은 형사는 더 설명도 없이 바로 자리를 떴다. “죽어도 왜 하필 비 오는 날 죽는 거냐고. 증거고 뭐고 아무것도 안 남았잖아.” 멀어져가는 형사에게서 윤리적으로 괜찮을지 의심되는 발언이 들렸지만 데이비트는 굳이 그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데이비트가 원하는 정보는 따지자면 사건 현장에 관한 것뿐이었다.
얼마나 복잡한 절차길래 그리도 오래 걸리는 것인지, 저녁 시간을 한참 넘긴 뒤에야 그들은 경찰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인근 유료주차장에 세워두었던 자가용을 찾아 나오며 데이비트는 적지 않은 주차요금을 내야만 했다. 신발도 벗지 않은 채 뒷좌석에 드러누워 있던 테스카틀리포카는 고여있던 차 안의 공기가 답답했는지 차가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벌떡 일어나 양쪽 창문을 활짝 열었다. 마주 보는 창문에서 공기가 들이치며 앞 좌석까지 바람이 불어온다. 비 온 뒤에 느낄 수 있는 시원하고 눅진한 바람이었다. 리어 뷰 미러를 통해 긴 머리카락이 커튼처럼 휘날리는 것이 보인다. 그의 기분이 조금 풀리는 것을 확인하며 데이비트는 조금 전에 묻지 못한 것을 마저 물었다. 주변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기엔 곤란하여 자제한 것이었다.
“목격했다는 사건 말이야, 아까는 좋지 못하다고만 표현했는데 구체적으로는 어떤 거지?”
“아마도 사람을 홀리는 계열이야. 이른바 정신조작.”
“현장에서 기억에 남는 점은?”
“흠, 일단 머리통이 박살 나 있었다는 거? 그 정도면 맞은 게 아니라 떨어진 거지. 머리를 내리쳐서 그렇게 만든 거라면 흉기든 그걸 휘두른 본인이든 분명 눈에 띄었을 거다. 뭐, 길가에 굴러다니던 돌이 혼자 움직여서 들이박은 걸 수도 있겠지만.”
“떨어지도록 유도한 거겠군.”
“그럴 가능성이 커. 문제는 누가 했냐는 거지. 내가 현장에 갔을 때 범인의 기운은 없었고, 잔향으로 추측되는 지독한 냄새만 가득했어.”
말하면서 당시의 냄새가 떠오르기라도 했는지 테스카틀리포카는 인상을 쓰며 담뱃갑을 꺼냈다. 입에 물린 담배는 라이터도 없이 불이 붙으며 희미한 연기를 만들어낸다. 매캐한 담배 냄새는 비 냄새와 섞이며 오묘한 향이 된다. 젖은 장작을 태울 때 나는 냄새와 비슷할 수도 있겠다. 거울 너머로 그 모습을 보던 데이비트는 말없이 운전석의 버튼으로 창문을 모두 닫았다. 테스카틀리포카도 별다른 불평은 하지 않았다. 담뱃재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까지는 앞 좌석에서 보이지 않았지만, 알아서 모아두고 있을 것이라는 판단하에 데이비트는 다음 질문을 던졌다.
“사체에 다른 특이사항은 없었나? 외상의 흔적 같은 건?”
“뒤집어보지 않았으니 확신은 못 하지만, 최소한 내가 볼 수 있는 범위에서는 전혀.”
“그렇군.”
신경질을 내던 형사에게는 미안한 소리지만, 아마 이번 일은 일반인의 영역이 아니다. 헛손질만 하다가 사건을 마무리할 것이 뻔하다. 그렇다고 깊게 관여하기엔 자세한 정황이 부족했다. 특정 마술사의 의도로 일어난 일이라면 섣불리 사건에 개입하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이다. 데이비트는 그렇게 결론 내리고 이야기를 끝내려 했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안 들었던 거라면 있어.”
“마음에 안 든다고?”
다음 상념으로 넘어가려던 데이비트는 마음에 안 든다는 표현이 신경 쓰였다. 그가 말하려고 하는 건 주관에 따른 소감이겠지만 개인의 소감이라는 건 의외로 핵심을 짚기도 하는 법이다. 물론 그런 것치곤 테스카틀리포카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구석에 숨어있던 캔에 담배를 비벼 끄고 다시 누우며 말했다. “어.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인데 신발만 고급 가죽으로 만든 구두더군. 내 패션 철학으론 받아들일 수 없어.” 지극히 테스카틀리포카다운 감상이었다.
차체에 부딪히는 빗소리는 대화가 끝난 뒤 찾아온 정적에 녹아들며 아늑한 화음을 이룬다. 정적이 깨진 것은 집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길 기다리던 때였다.
“아!”
테스카틀리포카는 불현듯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소리치며 일어나 운전석을 붙잡았다. 무슨 일이냐며 데이비트가 고개를 돌리자 그는 큰 실수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우산 두고 왔다.”
“…….”
이 또한 그들에게 있어 별거 아닌 작은 해프닝이었다.
***
유난히 비가 많이 오는 일주일이었다. 때아닌 우기라도 온 것 같았다. 최근 들어 이어지는 폭우에 푸른 하늘을 보기 힘들고 몸까지 무겁게 느껴지는 나날 속에서 그들은 휴가 아닌 휴가를 보내야 했다. 사막 횡단 여행을 하자던 데이비트의 제안은 끝내 기각되었고, 신이라면 날씨 조작 정도는 가능한 거 아니냐는 불평을 들으며 테스카틀리포카로서는 지긋지긋한 일주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오늘도 여전히 쏟아지는 빗속에서 그들은 실내 오락 시설에 자리를 잡고 내기를 벌였다. 라스베이거스 스트립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오락실에 성인 남성 두 명이 앉아 마리오카트를 하는 장면은 제법 재밌는 구경거리였지만, 감히 그들 근처에 다가오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쉬울 따름이다. 그리하여 열 판도 넘는 승부 끝에 승리를 거머쥔 데이비트는 내기의 보상으로 남은 휴가 동안 식사 당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식사까지 오락실에서 해결하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그들은 집으로 향했다. 오락실을 나설 때는 비교적 비가 잦아들었으나 차를 세워둔 곳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어 그들은 우산을 하나만 펴고 가기로 했다. 경찰서에 우산을 헌납한 꼴이 되어 새로 장만한 우산은 멀리서도 한눈에 보일 새빨간 색이었다. 어느 영화에서는 비 오는 날 빨간 옷을 입은 사람만 노리는 범인이 있다고도 하던데, 그렇다면 빨간 우산은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하던 데이비트는 차에 도착했을 즈음엔, 설령 테스카틀리포카를 노린다고 해도 당하는 건 범인 쪽이 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늦은 시간임에도 도로는 이상할 정도로 막혔다. 처음에 데이비트는 이를 날씨로 인한 것으로 여겼다. 잦아들었다 해도 우천 시 저속 운전은 기본 사항이다. 조금 지겹더라도 이해해야 했다. 그런 추측과는 달리 심한 교통체증의 원인이 날씨 때문만은 아닌 것을 알게 된 것은 도로 저편에서 폴리스 라인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였다. 어두운 밤에도 눈에 잘 들어오는 노란색 테이프 앞에서 교통정리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야광봉을 흔들며 차가 더 진행하지 못하도록 했다.
정리원에게 목소리가 닿을 거리까지 가까워진 뒤 데이비트는 창문을 내렸다. 정리원은 가까이 온 차가 상황 파악이 안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창문 근처로 와서 주의를 시켰다.
“이쪽은 지금 통제구간이니 돌아가세요.”
“무슨 일이죠?”
“아니 글쎄 사람이 죽었대요.”
살인 사건이라는 건가? 그런 생각으로 데이비트는 테이프 너머를 유심히 보았으나 문제의 사건 현장은 멀어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마술사로서 느껴지는 감각과 더불어 그는 남들보다 야생의 본능이 강했다. 조수석에서 눈을 감고 있던 테스카틀리포카도 낌새를 눈치챘는지 먼저 말을 꺼냈다.
“…좋지 않은데.”
“역시 그렇지?”
뒤에서 들리는 경적에 데이비트는 의문을 뒤로하고 차 방향을 돌렸다. 집까지는 에돌아가게 되었지만, 가는 동안 생각을 정리하기에는 딱 적당한 거리였다. 이번엔 뭘 시킬 셈이냐고 묻는 테스카틀리포카의 말에 데이비트는 지금 해야 할 일은 아직 아무것도 없으니 안심하라는 답을 돌려주었다. 물론 테스카틀리포카는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
지난밤 그들이 마주친 사건은 다음 날 아침 뉴스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20대 남성, 도로변에 쓰러진 채로 발견. 인근 빌라에서 홀로 거주하던 남성으로, 정황상 방 창문을 통해 떨어진 것으로 추정되나 타살 여부는 확인되지 않아… 따위의 내용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들은 최근 들어 의문의 추락사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시작이라고 부를 만한 사건이 얼마 전 테스카틀리포카를 용의자로 몰아간 그 사건이었다. 한동안 관심 영역에서 벗어나 있던 사건 떠올리며 데이비트는 당시 테스카틀리포카가 들려준 이야기를 기억에서 끄집어냈다.
머리가 깨진 채 떨어져 있던 남자. 수상한 기운. 행방을 알 수 없는 범인.
아직 판단하기엔 정보가 부족하다. 사건 현장을 데이비트가 직접 보았다면 달라졌을 수도 있겠지만 아쉽게도 그때 테스카틀리포카는 혼자였다. 데이비트의 특기는 현장 조사지만 이번 일은 관계자가 아닌 이상 직접 조사를 하긴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간접적으로 정보를 얻으면 될 일이 아닌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데이비트가 선택한 방법은 아주 단순했다. 그리고, 데이비트 젬 보이드는 아주 유능한 남자였다. 원하는 정보를 얻어내기까지는 고작 반나절밖에 걸리지 않았다.
쉬지도 않고 탁자에 앉아 노트북만 두들기는 데이비트를, 테스카틀리포카는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마실 것을 내어주다가 그마저도 질린 뒤에는 혼자 다트를 던지기 시작했다. 검은색과 빨간색으로만 이루어진 다트판은 거실벽 한가운데 걸려 있어, 다트를 던지는 중간에도 데이비트에게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줄곧 최고점이라고 하는 60점을 노리고 있었으나 맞추는 건 잘해봐야 그 아래의 20점이었다. 슬슬 다트에도 질려갈 무렵, 데이비트는 몇 시간 만에 몸을 돌리고 테스카틀리포카에게 물었다.
“저번 주에 봤다는 사건 피해자, 분명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구두를 신고 있었다고 했지?”
“그 이상한 패셔니스트 녀석?”
“사건 파일을 확인하고 있는데, 이 남자… 현장 사진에서는 신발을 안 신고 있어.”
“뭐?”
마침 다트를 새로 던지려고 하던 테스카틀리포카는 무심코 원래 던지려던 방향보다 좀 더 아래쪽으로 핀을 던지고 말았고, 그대로 날아간 핀은 다트판 한가운데에 꽂혔다. 불스아이. 50점이었다.
테스카틀리포카가 가까이 와서 노트북 화면을 보았을 때 데이비트는 이미 사진 파일을 모두 확인한 뒤 영상 파일로 넘어가고 있었다. 화면에 새로운 창이 계속 떴다 없어졌다 하는 것을 보다가, 테스카틀리포카는 조금 전 데이비트의 말에서 뒤늦게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잠깐만. 너… 설마 경찰 서버를 해킹한 거냐?”
“그렇다만, 문제라도?”
“그래도 넌 여기 시민이잖아….”
들키지 않는다면 문제 될 건 없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데이비트를 보며, 부디 들키지 않길 빈다고 신은 기도했다. 데이비트는 그 말을 농담 정도로 받아들이고 가장 신경 쓰이던 영상 파일을 열었다. 그는 테스카틀리포카에게도 잘 보이도록 전체화면 모드로 설정하고 옆으로 물러난 뒤 영상을 재생한다.
데이비트가 튼 건 소리 없는 CCTV 영상이었다. 영상은 한 남성이 방에서 컴퓨터 작업을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CCTV의 화질로 모니터 내용까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곧이어 남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가더니 상자 하나를 들고 다시 방으로 돌아온다. 상자에서 나온 것은 한 켤레의 구두였다. 크기를 확인하려는 것인지, 미리 구두를 발에 길들이려는 것인지, 남자는 구두를 신고 방안을 몇 걸음 걸었다. 그리고 그대로 컴퓨터 작업에 돌아가려는 듯싶더니 다시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전과 다르다. 특별한 목적 없이 내딛는 걸음이 아니었다. 박자에 맞춰 발을 내디디며 누군가의 손을 잡고 있기라도 한 듯 손을 든 남자는 빙글빙글 돌면서 방안을 돌아다녔다. 이런 분야의 문외한이라 해도, 특징적인 자세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누구나 알 수 있게 된다. 남자는 소리 없는 화면 속에서 파트너 없는 춤을 추고 있었다. 황홀경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춤을 추던 남자는 영상의 시간이 5분을 넘어갈 무렵 대뜸 그 자리에 멈춰서더니 창가로 향했고, 남자가 창문을 열자 아직 비가 내리고 있는지 들이치는 빗줄기로 바닥이 젖는 게 보인다. 그 모습을 끝으로 남자는 화면에서 사라졌다. 창문으로 뛰어내린 것이다. 영상은 거기에서 끝났다.
데이비트의 어깨에 기대서 화면을 보던 테스카틀리포카는 심심하게 감상평을 말했다.
“보나 마나 경찰 놈들은 자살로 마무리 짓겠군.”
“마침 비가 오는 날이니 실족사일 수도 있지.”
데이비트는 다시 노트북 앞에 바로 앉고 엑셀 파일을 열기 시작한다. 그 안에는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데이비트가 정리한 피해자 정보가 나열되어 있다. 피해자와 관련된 정보에는 개인 신상뿐 아니라 링크로 보이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영상에 나오는 상자 말인데, 찾아보니 그날 이 남자에게는 택배가 하나 왔던 모양이야. 내용물은 일주일 전에 구매한 구두. 아마 네가 봤다는 그 구두겠지. 웹으로 구매한 내역이 남아있는데, 문제는 구매한 사이트는 현재 이용할 수 없는 주소로 나와. 이 정도면 확신범이지.”
“찾아가는 죽음 서비스라는 건가. 끝내주는구먼.”
“다른 피해자들도 마찬가지야. 그들은 서로 다른 사이트에서 구두를 샀어. 하지만 발견된 사건 현장에서 신발을 신고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지. 마치 구두가 혼자 걸어 가버린 것처럼.”
거기까지 말한 뒤 데이비트는 눈을 감고 눈두덩이를 쓸었다. 이제야 눈이 피로해진 듯했다. 눈을 감은 데이비트의 목덜미로 서늘한 손이 닿는가 싶더니, 어느새 두 손은 뭉친 근육을 풀어주려는 듯 어깨를 여기저기 눌러댔다. 인정사정없는 테스카틀리포카의 힘이 제법 아파서 데이비트는 조금 인상을 쓰고 말았다. 데이비트는 그 상태 그대로 눈을 감은 채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나온 피해자들을 보면 몇 가지 공통점이 있어. 20대 남성, 현재 무직, 구두를 구매한 목적은 취업 준비. 아마 면접 때 차려입기 위해 산 거겠지.”
“그래서?”
“이걸 통해 유인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얘기지.”
“네가 직접 취업준비생이 되시겠다?”
“틀린 말은 아냐. 우린 지금 휴가를 받고 일이 없어졌으니, 그런 점에서 보면 백수나 다름없어.”
“이런 일을 하려고 하는 시점에서 백수라고 할 수 없다고, 형제~.”
그래서 데이비트가 테스카틀리포카에게 부탁한 것이 무엇이었냐. 바로, 위장 취업을 할 기업을 만들어달라는 것이었다. 오해가 있을 수 있으니 조금 고쳐 말하자면 정확히는 사장 역할만 해달라는 것이 데이비트의 부탁이었다. 있지도 않은 기업은 데이비트의 서류 조작으로 만들어낼 수 있었지만, 본인이 만든 회사에 본인이 취업하는 것은 역시 문제가 있을 듯하여 명의를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이미 신분 때문에 의심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 맞냐는 생각도 들었지만, 테스카틀리포카는 오히려 이런 상황을 즐기는 쪽이었기 때문에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물론 여기서 일이 잘 풀린다면 이야기는 재미없어진다. 작전을 시작한 이후로 데이비트가 종일 하는 일이라곤 쇼핑몰을 서핑하며 구두를 찾는 것뿐이었지만,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비슷한 구두조차 찾기 힘들었다. 데이비트는 구두 디자인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테스카틀리포카가 보기에는 제법 독특한 디자인이라는 듯했다. 다른 구두와 헷갈릴 일은 없다는 것이다.
혹시나 하고 다른 사건이 추가로 발생하지는 않았는지 찾아보아도 불행인지 다행인지 새로 생긴 피해자는 없었다. 잘못된 길에 들어선 것을 알면서도 다른 길을 찾아 나서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닌 이상, 빠른 작전 수정은 중요하다. 그것이 데이비트의 신조였다.
“역시 진짜 회사에 구직 활동을 해야 했나.”
“한다고 해도 어디에 할 건데.”
“운전기사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버스 회사라든가.”
“재미는 있겠네.”
테스카틀리포카는 데이비트가 운전하는 버스에 타는 것을 상상한다. 지프차도 제법 큰 차량이긴 하지만, 버스만 한 대형차를 모는 것은 아직 본 적 없었다. 이곳은 비교적 한가한 지역이어도 어쨌든 도시인 만큼 차를 험하게 모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 덕분에 할리우드 액션 영화 같은 드라이브를 겪을 일은 없었지만, 대형차가 되면 또 어떨지 모르는 일이다. 차체의 길이를 고려하지 않고 커브를 하는 바람에 뒤쪽 자리에서는 멀미가 심하게 날 수도 있다. 가능한 운전석에 가까운 자리에 앉는 편이 위장을 위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테스카틀리포카는 시뮬레이션을 마쳤다.
“지금 우리에게 뭔가 빠진 것이 있는 건 분명해. 그게 회사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 뭔가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건 없나?”
“글쎄. 우산이라도 깜빡한 거 아냐?”
“우산을 깜빡한 건 너겠지.”
테스카틀리포카는 제법 섬세한 구석이 있는 편이다. 자신의 실수를 지적당하면 나름대로 상처도 받는다. 믿기지 않는다고? 하지만 실제로 지금 이 전능신은,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지 않냐며 조금 상처를 받은 상태다. 그러거나 말거나 데이비트의 추론은 이어진다. 그리고 데이비트는, 없던 시련도 만들어내는 신의 악운이 가끔은 단서가 된다는 사실을 금방 인정하게 된다. 잊어버린 우산. 폭우와 함께한 일주일. 연쇄적으로 발생한 추락사.
“……요즘 비가 안 왔어.”
“맞아. 어이없게도 여행 갈 수 있는 날씨가 되니 이 꼴이 됐지만.”
“아니, 그 얘기가 아니야.”
데이비트의 머릿속에는 이미 사건 관련 정보가 모두 저장되어 있다. 언제, 어디서 피해자가 발견되었는지, 사망 추정 시각이 언제인지 또한 기억한다. 기억을 떠올리며 데이비트는 날씨 정보 사이트를 확인한다.
일주일 내내 줄기차게 비가 내렸다고 해도, 그동안에도 비가 멈춘 때는 분명히 있다. 그렇다면 사건들이 일어난 시각에는 어땠는가? 그때만큼은 항상 하늘에 구멍이 뚫리기라도 한 것처럼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줄기와 건물에서 떨어지는 인간.
누군가의 의도대로 이루어진 일이라면, 이 일을 꾸민 존재는 정말이지 성질이 고약한 예술가일 것이라고 데이비트는 생각했다. 일기예보도 확인했다. 계획의 가닥은 잡혔다. 남은 것은 실현 가능성을 재보는 것이다.
“테스카틀리포카, 이번 범인은 네가 보기에 어떻지? 저번 녀석보다는 강한가?”
“아무래도 그렇지. 건장한 성인 남자를 고꾸라트릴 수 있다면 그건 강하다고 해도 되겠지.”
“그럼 그 녀석이 도시에 출몰하면 위치도 찾아낼 수 있겠어?”
“너, 나를 너무 탐지기처럼 쓰는 거 아니냐. …물론 가능하다만.”
“그거면 됐어. 남은 건 내가 어디까지 파악하느냐지.”
다음에 비가 온다고 예보된 건 이틀 뒤다. 데이비트는 반드시 추가 희생자를 내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
오랜만에 다시 시작된 폭우에 미처 우산을 챙겨 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처마에서 비를 피하는 모습이 길 곳곳에서 보인다. 차 안에서 그 광경을 보던 테스카틀리포카는 역시 우산을 잘 챙겨야 한다고 남의 일처럼 말한다. 오늘도 집을 나서면서 우산 2개를 챙긴 것은 데이비트였지만, 그는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직 비가 내리기 시작하지 않은 오늘 새벽부터 온종일 도시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지난 이틀간 데이비트는 이 도시에 거주 중인 20대 무직 남성을 파악하고, 최근 그들의 소비 내역을 조사하여 후보군을 좁혔다. 그 후보군을 얻어내기까지 대체 얼마나 서버를 턴 것인지, 테스카틀리포카는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파악한 후보군의 신상 정보는 전부 데이비트의 머릿속에 들어있다. 정도로만 따지면 데이비트의 기억력은 과잉 기억 증후군에 밀접하다. 그의 기억 제한이 5분이었던 때에도 하루에 남길 수 있는 기억이 5분이었을 뿐, 한 번 기억에 남긴 5분은 영구하게 유지된다. 과도하게 많은 정보에 노출되는 현대 사회에서 그의 기억력은 정신 건강에 그다지 좋은 영향을 주지 않는다. 한 번은 테스카틀리포카가 불필요한 기억은 지워줄지 물은 적도 있었으나 데이비트는 단호히 거절했다. 이유는 말하지 않았지만, 테스카틀리포카도 그 이후로 기억에 관한 얘기를 꺼낸 적은 없다. 거절한 이유는 글쎄, 정보에 우선순위를 매기는 것이 지겨워지기라도 한 것은 아닐까.
범인이 나타나길 기다리면서 데이비트는 핸드폰으로는 배송이 완료된 후보를 확인하고 머릿속으로는 해당하는 이름을 지워간다. 후보군 중 어느 한 집을 지나면서 우연히 구두 상자를 들고 온 배달원을 보기도 했지만, 당연하게도 그건 평범한 사람이었다. 첫 희생자의 영상 기록을 제외하면 피해자들이 택배를 받는 모습은 확인된 적 없다. 첫 희생자도 받는 순간이 목격된 것은 아니다. 누가 그 상자를 배송했는지 또한 기록에 남은 것이 없다. 차라리 아무도 보지 못해서 다행일 수도 있겠다고 데이비트는 생각했다. 만일 모습이 어딘가에 찍혔다 해도 인간이 만든 기술과 인간의 눈으로 그 모습이 확인될 거라는 보장도 없으며, 실제로 그 모습을 인간이 보았을 때의 영향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덧 남은 후보가 한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무렵, 데이비트는 쏟아지는 피로를 쫓아내기 위해 카페를 찾았다. 원래 새벽부터 활동하는 체질이지만 온종일 운전하며 신경을 곤두세우는 건 인간의 몸에는 힘든 일이 었다. 이런 경우 적당량의 카페인은 도움이 된다. 데이비트는 테스카틀리포카의 몫도 사 올지 물으려 했으나, 어느새 그는 뒷좌석에 퍼질러 누워있었다. 데이비트는 알아서 커피를 두 잔 사 들고 돌아왔고, 테스카틀리포카를 깨우는 대신 그의 몫의 커피를 뒷좌석 컵홀더에 두기만 하려고 했다. 뒷좌석 문을 열고, 커피가 쏟아지지 않을 위치에 잔을 잘 놓은 뒤 다시 문을 닫으려고 했을 때, 데이비트는 갑자기 튀어나온 손에 팔을 잡히고 말았다.
“…자는 줄 알았는데.”
“누워만 있는 거다. 너도 뒤로 와.”
“됐어. 언제든 출발할 수 있으려면 운전석에 있는 게 나아.”
“내가 무슨 말 하는 건지 알면서 그래?”
“……아무리 갓길이어도 여긴 도심이야. 곤란해.”
“잠깐은 괜찮아.”
“안 괜찮아.”
“괜찮아.”
“안 괜찮아.”
“괜찮아.”
“…………아주 잠깐만이다.”
신은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웃는다. 그 모습에 데이비트는 누군가 이 신을 악마라 칭했던 사실을 떠올린다. 매번 이런 식으로 넘어가 주는 자신이야말로 어쩌면 악마에게 홀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자조하며 데이비트는 뒷좌석 문을 닫았다.
***
한 남자가 방에서 홀로 컴퓨터 작업을 하고 있다. 화면에 보이는 것은 문서 작업 창이다. 남자는 면접을 위한 자기소개를 준비하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럴싸한 말을 떠올려내지 못해 머리를 싸매던 중, 현관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그러고 보면 오늘 오기로 예정된 택배가 있었다. 남자는 한숨 돌릴 겸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을 향한다.
문을 연 곳에 있는 건 푸른 작업복을 입고, 모자를 깊게 눌러쓴 배달원이다. 모자챙 때문에 얼굴에 그늘이 져 눈은 보이지 않는다. 남자는 본인이 수령한 것이 맞다고 증명하는 서류에 서명하고 상자를 받아들었다. 상자는 보기보다 가벼웠다. 배달원은 그새 떠났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밖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다. 그러고 보면 배달원은 우산도 없고, 옷도 젖어 있지 않았다. 그 순간 남자의 머릿속에서 배달원에 대한 기억이 사라진다. 남자는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저 빨리 이 구두를 신어보고 싶을 뿐이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남자는 상자를 뜯고 구두를 꺼낸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이었던 것이 믿기지 않는 고급스러운 디자인이다. 양발을 구두에 끼워 넣자 주문 제작이라도 한 것처럼 딱 맞는다. 남자는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기분이다. 조금 전까지 자기소개를 작성하던 창을 닫아버리고 남자는 인터넷을 연다. 뭔가를 찾는가 싶던 남자는 만족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때, 어느 사내 둘이 문을 박차고 들어온다. 거센 힘으로 밀어붙인 문짝은 경첩째로 떨어져 나간다. 사내들은 염치없게도 진흙투성이인 신발로 방에 들어선다. 머리카락이 짧은 쪽 사내, 데이비트는 방 한가운데에 서 있는 남자를 붙잡는다. 조종당하고 있는 인간의 몸은 사후경직과 맞먹을 정도로 단단하게 굳어있다. 정신은 이미 죽어있는 거나 다름없기도 하다.
방안은 음악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쇼스타코비치의 왈츠 2번이다. 남자의 컴퓨터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남자는 음악에 맞춰 움직이기 시작하려 한다. 이렇게 되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움직이지 못하게 될 때까지 때려눕히는 수밖에 없다. 오랜만에 하는 육체노동에 힘 조절이 되지 않아, 흠씬 두들겨 맞은 남자는 코피를 흘리며 바닥에 널브러진다. 팔이 꺾인 각도를 보면 어깨가 탈골됐을 수도 있다. 그 광경을 재밌게 구경하던 테스카틀리포카는 상황이 얼추 정리되는 기미가 보이자 태평하게 말했다.
“오, 폭력으로 해결하는 거냐? 그런 거라면 나한테 맡겨도 됐는데.”
“그런 거 일일이 부탁할 시간 없어. 됐으니까 반대쪽 구두나 벗겨봐. 혹시라도 안 벗겨지면 발목을 통째로 잘라내야 해.”
“그냥 처음부터 자르면 안 되고?”
“그럼 이 남자 뒤처리까지 해야 하잖아. 안 해도 되는 일은 안 만드는 게 나아.”
“하긴 그렇지.”
다행히도 구두는 양쪽 모두 잘 벗겨졌다. 볼일을 끝내자마자 그들은 미련 없이 남자의 집을 떠났다. 뒤늦게 정신 차린 남자는 현관이고 방 문짝이고 본인의 몸뚱이고 전부 박살이 나 있는 것을 알게 되겠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목숨값이라고 생각하면 싸게 먹히는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라도 용의자로 잡히면 귀찮아질 테니, 테스카틀리포카는 나가는 길에 비에 젖은 발자국이 남지 않도록 손 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집을 빠져나간 그들은 단숨에 차가 주차된 곳까지 간다. 구두는 두 짝 모두 데이비트의 손에 들려 있는 채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그에게는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듯하다. 근처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데이비트는 구두를 테스카틀리포카에게 넘겼다. 제거할 방법이 없다면 달리 격리 조치를 했겠지만, 테스카틀리포카가 있는 이상 그런 일은 번거로울 뿐이다. 구두를 받은 테스카틀리포카는 한참이나 구두를 유심히 살폈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위험 요소를 확인하는 건가? 데이비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이내 아주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데이비트, 가까이에서 보고 깨달은 게 있다.”
“뭐지?”
“이 구두, 디자인이 내 취향이야.”
“허튼 생각 하지 말고 당장 없애.”
알고 있네요, 그런 못내 아쉬워하는 소리가 들린 것은 덤이다.
테스카틀리포카의 손에서 생겨난 것은 검은 어둠이다. 어둠은 물에 뜬 석유처럼 어지러운 무늬로 가득하다. 점차 구 형태를 갖추던 어둠은 크기를 키우며 늪에 빠지는 것처럼 구두를 집어삼킨다.
“죽음 앞에서 춤추는 건 그만큼 싸움에 흥이 올랐기 때문에 가능한 거야. 네 맘대로 춤추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애송아.”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는 것과 동시에 검은 구체는 비눗방울처럼 터지며 사라졌다. 테스카틀리포카는 마지막까지 구린내를 풍긴다며 투덜댔지만, 데이비트에게 느껴진 것은 고작해야 발 냄새 정도였다. 신령이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고생했어.”
“말로만?”
“더 원하는 거라도 있나?”
“음. 하나뿐인 짝꿍의 정성 어린 입맞춤이라면 괜찮을 수도 있겠군.”
“그런 거라면 고생하지 않아도 하잖아.”
“뻥 치지 마. 해준다고 해도 도망가는 게 대부분이잖아.”
“그건… 그만큼 힘들게 할 때가 많으니까 그렇지.”
“그러셔?”
대답이 시원찮다는 듯 테스카틀리포카는 데이비트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눈싸움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고 있기를 몇 초, 아무렴 어떻냐며 테스카틀리포카는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이거, 저번 일이랑 출처가 같은 거 같지?”
“그래. 직거래만 하는 게 아니라 통신판매까지 가능하다면 생각보다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도 일어나는 사건이 많겠지. 확인 가능한 범위 일이라면 손이 닿는 대로 해결하겠다만… 쉽지는 않겠군.”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고. 눈앞에 보이는 일은 제대로 해낸다, 그거면 되는 거야.”
거세게 쏟아지던 비도 소강상태에 접어든다. 사건 하나를 해결한 것에 기뻐하며 테스카틀리포카의 휘파람이 시작된다. 오늘따라 유난히 낯설게 들리는 왈츠였다. 매끄럽게 이어지는 휘파람 소리를 듣던 데이비트는 문득 입맞춤 대신 춤도 보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직접 춰본 적은 없지만 지식이라면 있다. 분명히 얼마 전에 봤던 영화에서도 그런 장면이 나왔다. 데이비트는 차로 향하던 테스카틀리포카를 불러세우고 손을 내민다.
“Shall we dance?”
무드라곤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와 불쑥 내민 손이 영 어울리지 않았다. 무덤덤한 얼굴과 손을 번갈아 보던 테스카틀리포카는 바람 빠지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러고 보면 이 남자는 원래 이런 구석이 있었지, 라는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빗속의 왈츠라, 낭만적인데.”
휘파람은 이미 멈춰버렸다. 반주는 필요 없다. 우산도 필요 없다. 떨어지는 빗방울은 그 자체로 하나의 배경이 되고, 단 두 명의 주연만으로도 무대는 완성된다.
테스카틀리포카가 데이비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면, 데이비트도 손으로 그 등을 받친다. 오른발에서 왼발로, 왼발에서 오른발로 무게 중심이 이동하며 발끝에 힘을 주어 내딛는 스텝으로 웅덩이에서는 가벼운 물보라가 일어난다. 이미 비로 흠뻑 젖은 옷에 티도 나지 않을 얼룩이 생긴다. 비가 내리는 한적한 거리에서, 관객 없는 왈츠는 이렇게 상연되었다.
이러고 다음 날 데이비트는 멀쩡한데 테스카틀리포카만 감기 걸렸다고 하면 재밌을 거 같지만, 그건 번외로 칩시다^^,,, 혹시나 해서? 변명해두자면 저는 이런,, 춤을 추는 것 같은 상황에서 수가 남성 포지션 맡는 걸 좋아해서 (공은 어느 쪽이든 상관없음) 이렇게 정했는데 그래도 테스데이가 맞습니다. 반대가 아닙니다. 진짜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