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츠메 소세키의 ‘몽십야’ 오마주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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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이런 꿈을 꾸었다. 물거품이 눈앞에서 일렁이다 사라졌다. 바닷속이었다. 저 앞에서 수면을 통해 들어온 희미한 빛이 보였다. 어디선가 나타난 물고기 무리는 나를 중심으로 갈라졌다가 다시 모이더니 순식간에 시야에서 벗어났다. 마지막 물고기마저 사라지자 나는 세상에 혼자인 것처럼 바다 한복판에 남겨졌다. 내가 숨을 내쉴 때마다 작은 공기 방울이 만들어지며 중력을 거슬러 올라갔다. 목덜미를 더듬어보아도 아가미는 없었지만 숨을 쉬는 데에는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마치 내 안의 어딘가에서 산소가 만들어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미끄러지듯이 앞으로 나아갔다. 가야 할 곳은 알고 있다. 이미 몇 번이고 간 곳이다.
산호의 숲을 두 번 넘어 도착한 곳에는 바위 없이 펼쳐진 모래밭이 있었다. 그곳에서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서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 상반신은 인간의 것이지만 허리 아래로는 비늘에 덮인 거대한 꼬리가 이어져 있다.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꼬리는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도저히 인간의 다리처럼 일어서게 해줄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두 손을 바닥에 짚으며 또다시 직립보행을 시도했다.
“너는 왜 일어서려고 하는 거지?”
연습에 열중하던 소녀는 그제야 나를 보았다. 놀라는 기색은 없다. 처음부터 내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소녀는 약간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야 육지로 나가야 하니까. 저번에도 말했잖아.”
그렇구나. 그랬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소녀는 육지로 나가 왕자님을 만날 것이라고 했던 것도 같다. 육지가 어떤 곳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바닷속의 그 누구도 바다 위로 올라가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다. 잘못하면 사악한 인간에게 잡힐 수도 있어. 미지는 두려운 것이야. 그런 식으로 육지에 관한 이야기는 불문에 부치기로 되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소녀는 육지를 원했다. 감히 누구도 넘보지 못한 곳을 향하고자 했다.
“다리를 만들어줄까?”
그러는 편이 소녀를 위해 좋을 것 같았다. 꼬리로 일어서다니, 설령 성공한다 해도 물 속이면 모를까, 메마른 육지에서는 지느러미가 말라 그 아름다운 빛을 잃을 것이다. 지금도 이미 꼬리에는 군데군데 까지고 긁힌 상처로 가득했다. 그대로 방치했다가는 자칫하면 헤엄도 못 치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소녀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니, 그건 내가 아니야. 나는 이 모습 그대로 왕자님을 만날 거야. 그게 아니면 의미가 없어.”
과연. 나는 바로 납득하고 말았다. 소녀라면 그렇게 말할 것 같았다. 한숨을 돌린 뒤 소녀는 다시 일어서는 연습을 했다. 손을 바닥에 딛고, 허리를 펴고, 손을 놓고, 넘어지고.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제도, 그제도, 그리고 그보다 훨씬 전부터 이 일은 계속됐다. 어쩌면 소녀가 찾는 왕자는 이미 육지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소녀는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넘어지는 소녀의 주변으로 모래가 흐트러졌다. 모래알이 떠올랐다 가라앉는 왕복 운동을 보고 있으니 어렴풋이 졸음이 몰려왔다. 눈앞에 안개가 끼는 듯하더니 시야가 부예지며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안 돼, 아직 그 아이가 성공하지 못했는데. 조금만 더 지켜보게 해줘. 그렇게 생각한 순간, 피어오르는 물거품 사이로 우뚝 서 있는 누군가의 실루엣이 보인 것 같았다.
02
이런 꿈을 꾸었다. 나는 허공을 낙하하고 있었다. 빠르게 변하는 시야를 견디지 못하고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끝없이 추락하는 느낌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끝은 있을까? 끝이 있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날까? 그런 생각을 하던 중 나는 낙하가 멈춘 것을 알아차렸다. 바닥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공중을 날고 있다. 단지 날개를 쓰는 법을 깨달았을 뿐이다. 그랬다. 나에게는 크고 검은 한 쌍의 날개가 있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커다란 날개를 가진 소년이 안도한 표정을 하며 내 옆으로 날아왔다.
“정말로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요. 무슨 일 있었어요?”
무슨 일이 있었을 텐데, 잘 기억나지 않는다. 혹시 왕자님을 본 적 있냐는 질문을 하자 소년은 골똘히 생각에 잠기더니 그런 건 못 본 것 같다고 답했다. 모르지만 열심히 생각하는 모습이 참 성실하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지금은 그런 것보다 새로운 둥지를 찾는 것이 더 중요했다. 새장을 뛰쳐나온 지 벌써 3일이 지났다. 우리는 여전히 보금자리를 찾지 못해 허공을 맴돌고만 있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 비행을 하면 날개에 힘이 빠져 곤두박질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역시 새장 밖은 쉽지 않네요.”
소년은 조금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탈출할 때만 해도 밝은 미래가 펼쳐져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혁명이란 본래 그런 법이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행동이 새로운 고통을 불러온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새로운 고통에서 벗어날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다. 내가 후회하냐고 하자 무표정하던 소년은 나긋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뇨, 전혀요. 설령 이대로 헤매기만 하다 죽는다고 해도 전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그곳은… 그렇지. 아주 갑갑했거든요.”
갑갑하다. 그렇게 표현했다. 나는 그것이 아주 미화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목청껏 노래하지도, 드높이 날지도 못하게 한 그곳을 갑갑하다는 말 하나로 정리할 수 있는 소년의 관대함이 사뭇 대단히 여겨졌다. 그렇기에 나 같은 돌연변이와 함께 행동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다시 한번 날개에 온 힘을 실었다.
하늘을 나는 동안 해는 왼쪽에서 떴다가 오른쪽으로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해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듯한 기분이 들 무렵, 우리는 버려진 것으로 보이는 둥지를 발견했다. 둥지는 생각보다 깨끗해서 바로 사용해도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였다. 둥지에 들어와 날개를 접은 나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해가 가까워져서인가? 아마도 더웠던 모양이다.
“드디어 마음 놓고 쉴 수 있겠는걸.”
“무슨 소리세요. 선배는 계속 가셔야죠.”
순간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는 둥지를 찾아 여기까지 왔을 터인데 더 어디를 간단 말인가. 나는 무어라 반박하는 말을 꺼내려 했다.
“제 친구가 선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만나면 제 안부를 전해주실 수 있을까요?”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소년은 나를 살짝 밀어냈다. 그 가벼운 손짓은 마치 나에게 손 인사라도 건네는 듯했다. 발이 허공을 밟으며 부유하는 느낌이 들었다. 떨어지기 전에 어서 날갯짓해야 한다. 그러고 보니 날개는 어떻게 쓰는 거였더라? 애초에, 나에게 날개가 있었던가? 사고가 정지한다. 또다시 추락은 이어진다.
03
태양은 오늘도 모든 것을 태워버릴 기세로 내리쬐고 있었다. 물은 이미 꼬박 하루 동안 입에도 대지 못했다. 지쳐버린 나는 기어이 바닥에 드러눕고 말았다. 더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만약 이대로 오늘도 오아시스를 찾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사막에서 말라 죽어간 선구자들을 떠올린다. 이런 곳이라면 백골조차 풍화되어 흔적도 남지 않을 것이다.
“정신 차려. 이런 곳에서 죽을 셈이야?”
가까스로 눈을 뜨자 소년은 나를 죽일 듯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변명할 기력도 없이 그 시선을 받아냈다. 어쩌면 말라 죽기 전에 소년에 의해 죽는 것이 빠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년의 머리 위 저 높은 곳에서는 까마귀 두 마리가 깍깍하는 소리를 내며 원을 그리고 돌더니 점차 멀리 사라져갔다. 우리도 저 새들처럼 하늘을 날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잠시 하늘을 보았을 뿐인데도 강렬한 햇빛에 눈이 부셨다. 나는 피로해진 눈을 다시 감았다.
“하여간 성가신 녀석.”
머리 위에서는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팔이 억지로 잡아 당겨졌다. 몸에 힘이라곤 들어가지 않았지만 결국 소년은 나를 일으키는 데에 성공하고 말았다. 보기보다 오지랖이 넓은 애다. 기어이 나를 부축한 채로 걷기 시작했다. 혼자서라면 훨씬 빨리 이곳을 벗어났을지도 모르는데, 미련한 선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소년은 나를 버리지 않았다. 사막의 밤은 춥다. 이런 몸 상태에서 잠들면 바로 저체온증으로 저세상행이다. 말라 죽을 것인가, 얼어 죽을 것인가. 어느 쪽도 썩 내키지는 않았다. 내 맘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다리에 힘을 줬다. 아직은, 더 걸을 수 있었다.
둔해진 시간 감각으로는 지금이 몇 시쯤인지 알기 어려웠다. 정수리 위에 있던 해는 어느샌가 기울어져 발밑으로는 기다란 그림자가 만들어졌다. 그림자는 금방이라도 내 발에서 떨어져 나가 혼자서 살길을 찾아 나설 것처럼 길어져 갔다.
“아!”
나란히 걷던 소년이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정신력은 이미 한계에 다다른 채였다. 초점이 잘 잡히지 않는 눈으로 우리가 가던 방향을 유심히 보았다. 아지랑이 사이로 빛이 반사되는 무언가가 보였다. 신기루가 아니었다. 틀림없는 물이었다. 그 뒤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직 거리가 한참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샌가 우리는 물 앞에 주저앉아 있었다. 웅덩이로 고개를 숙이자 수면 위로 내 얼굴이 비쳤다. 마치 남의 얼굴을 보는 듯 낯설게 느껴졌다.
“어때. 내 말 듣길 잘했지?”
오랜만에 한바탕 세수를 한 소년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젖은 앞머리에서는 물 한 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리도 간절했던 물이었다. 나는 그 개운해 보이는 얼굴을 보며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물가에는 작은 꽃 한 송이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04
현기증이 났다. 거울 너머로 또 거울이 이어져 있어 어디가 끝인지 보이지 않았다. 쓰러질 것 같은 느낌에 손을 뻗자 손바닥이 거울에 닿았다. 허상 같아 보이던 것에도 실체는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주위로 팔을 뻗으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보이는 것과 실제 거리가 달라 멀미가 날 것 같았다. 일반적으로 미로를 탈출하기 위해서는 한쪽 벽면만 짚으며 따라가면 된다고 하지만, 그것조차 이곳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한참을 걸어도 원래 자리로 돌아온 건지조차 알기 어려웠다.
거울이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해 여기저기 부딪히길 수어 번 반복했을 때, 그 아이는 나타났다. 바닥까지 거울로 되어있다는 걸 모른 채 바닥을 구를 뻔한 나를 뒤에서 덥석 잡아당기는 것이 느껴졌다. 보기보다 힘이 센 아이였다. 덕분에 앞으로 구르는 대신 뒤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지만 천만다행이었다. 이 앞에 놓인 절벽이 어느 정도 높이인지는 감을 잡을 수 없으니 말이다. 순간 간담이 서늘해졌다.
“아직 여기 온 지 얼마 안 된 모양이구나?”
그 아이는 내 얼빠진 모습이 재밌다는 듯 키득대며 웃었다. 그 모습이 왠지 밉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아이의 말에 의하면 이곳엔 신기한 것들이 아주 많다고 한다. 내가 궁금해하자 아이는 혼자 돌아다니며 발견한 것들을 신나게 읊었다. 그중에서도 흙 없이도 자라나는 꽃과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작아지지 않는 풍선 이야기는 제법 흥미로웠다. 그렇게 쉼 없이 말을 쏟아내던 아이는 어느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아하하, 미안. 계속 혼자서만 말하고. 나 참 이상하지?”
그 아이는 머쓱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전혀 웃음기가 느껴지지 않는 웃음소리였다. 어쩐지 그 어깨가 움츠러드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게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괜찮아. 나도 이상한 사람이니까. 우린 닮은 꼴이네.”
솔직한 심정을 말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말하자 아이는 조금 전과는 다르게 조용히 웃었다. 아까보다 훨씬 보기 좋은 웃음이었다. 나도 똑같이 웃어주었다. 그 뒤로도 우리는 거울로 둘러싸인 세상을 돌아다녔다. 출구는 여전히 찾지 못했지만, 수확은 있었다. 아까까지 그 아이가 말한 것처럼 처음 보는 것들로 가득한 곳에 도착한 것이다. 내가 혼자 다닐 땐 한 번도 보지 못한 것들이다.
나는 그중에서도 반대편 벽에 있는 액자에 눈길이 갔다. 연분홍빛 틀에 여러 모양의 리본으로 꾸며진 예쁜 액자였다. 다만 액자 안에는 아무것도 없어서 그 안쪽으로는 줄곧 보던 것과 같은 거울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틀 안으로 내 얼굴이 비쳤다. 내 초상화라도 보는 기분이다. 나는 각도를 바꿔가며 액자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너는 어디 있지?”
참 이상한 질문이었다. 방금까지 나란히 걸어온 상대에게 어디 있냐고 묻다니. 이 아이도 분명 나를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하지만 별 상관은 없었다. 우리는 원래 이상한 사람이니까. 그렇지? 그런 말을 건네려고 다시 옆을 보았을 때, 그곳에는 나를 비추는 수많은 거울만이 가득했다. 여긴 이미 아무도 없었다.
05
여전히 바깥은 눈보라가 멈출 생각을 보이지 않는다. 몇 번인가 구조 신호를 쏘아 올렸지만 그것도 벌써 일주일 전의 일이다. 아직도 구조대가 오지 않는다는 건 아무도 신호를 보지 못한 것이라고 봐야겠지. 벽에 기대고 있자 가끔 거센 바람에 문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곳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오래된 통나무집이 이 정도로 버텨준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화로에 올려둔 주전자에서는 끓는 소리가 나며 김이 피어올랐다. 얼마 남지 않은 장작을 모아 끓인 수프였다. 오랫동안 굶주린 배는 허기도 느끼지 못하게 되었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살아남기 위한 행위다. 감각이 마비되는 것은 그다지 좋은 신호가 아니다. 느끼지 못한다 해도 해야 할 것은 해야 한다. 나는 잘 닦아낸 잔에 수프를 조금 따라서 구석에 앉아있던 소녀에게 내밀었다. 소녀가 나에게 무언가를 먼저 요구하는 법은 없었지만 건네는 것을 거부하는 것 또한 하지 않았다.
“뜨거우니까 조심하렴.”
내 말을 들은 건지 아닌지, 소녀는 잔을 가만히 들여다보고만 있더니 어느 순간 한 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소녀에게 따라주고 남은 것을 내 몫의 잔에 따른 나는 아직 입에도 대지 못하고 있었다. 소녀의 잔은 그새 바닥에 놓였다. 먹느라 대답을 못 할 일은 없다. 뜨거운 김을 후후 불어내며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이미 몇 번이고 퇴짜를 받은 얘기였다.
“이제 그만 나가보는 게 어때?”
“…어차피 여길 벗어날 수 없을 거야.”
감정 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 소녀는 고개를 다리 사이에 파묻으며 웅크렸다. 한없이 작아 보이는 모습이, 마치 영장류가 세상에 나타나기 전부터 그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을 것만 같았다. 의욕 없어 보이는 소녀의 모습에 나는 화제를 바꿔보기로 했다.
“그럼, 바깥에 나가면 하고 싶은 건 없어?”
“그런 게…….”
있을 리 없다고 할 것이라 생각했다. 우리의 대화는 보통 그런 식이었으니까. 하지만 의외로 소녀는 말을 잇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아주 머나먼 옛날을 회상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긴 침묵 끝에 소녀는 입을 열었다.
“노래를… 만들기로 했어.”
세상 모든 사람을 구할 수 있는 노래를. 나를, 구할 수 있는 노래를. 소녀의 눈에 빛이 깃드는 것이 보였다. 왠지 그 눈에서 눈물이 떨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소녀는 금방 평소와 같은 눈빛으로 돌아갔다. 조금 아쉬웠다.
“완성되면 나한테도 들려줄래?”
“……그래.”
잔에 남아있던 수프는 어느새 차게 식었다. 조금 전의 소녀처럼 나도 한입에 털어 넣는 순간, 낡디 낡은 문은 결국 바람을 버티지 못하고 떨어져 나갔다. 이제 끝장이구나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눈보라가 들이칠 기색은 없었다. 나는 잔을 내려놓고 조금씩 문으로 다가갔다. 오랜만에 보는 햇빛에 눈이 부셔 잠시 눈을 찡그려야 했다. 빛에 적응이 된 눈으로 내다본 밖은 눈보라가 멈춰 맑게 갠 푸른 하늘 아래로 새하얀 눈밭이 펼쳐져 있었다. 우리를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06
새하얀 구름은 아무리 발을 내딛어도 구멍 하나 나지 않았다. 군데군데 희미하게 분홍빛을 띠고 있는 것은 꼭 솜사탕 같았다. 한 주먹 떼어 입에 넣으면 단맛을 내며 녹아내리는 게 아닐까. 구름 사이로 보이는 하늘도 분홍빛이어서, 해는 보이지 않았지만 해 질 녘이라고 마음대로 결론 내렸다. 해가 완전히 지면 이곳은 어떻게 될까? 어둠 속에 묻히는 걸까? 분홍빛 하늘을 보지 못하게 되는 건 조금 섭섭할 것 같았다.
“어때? 그쪽엔 보여?”
주위를 둘러보며 딴생각을 하는 나에게 소녀가 물었다. 실은 소녀의 부탁을 들어주는 게 아니라 감상에 잠겨있었을 뿐이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소녀는 인형을 찾고 있다고 했다. 음, 인형이라고 하기엔 혼자 움직이고 말도 하는 인형이지만, 어쨌든 작은 고양이 인형이라고 한다. 한눈판 사이에 혼자 멀리까지 가버린 인형은 어느샌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모양이다.
“어쩌지… 구름 밑으로 떨어진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찾긴 힘들겠는걸.”
“그건 안 돼!”
소녀는 조금 화난 것 같았다. 나는 나의 무심함에 솔직하게 사과했다. 소녀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받아주었다. 나도 좀 더 성실하게 미아 찾기에 임하기로 했다. 인형은 원래부터 호기심이 많아 처음 보는 게 있으면 쪼르르 달려가 버린다고 한다. 어쩐지 아직 만난 적 없는 인형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음? 그렇다면, 나라면 어디로 갔을지를 생각해볼까?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구름 사이로 반짝이는 것들이 보였다. 저건 구름이 빛나는 걸까, 아니면 구름 뒤로 빛나는 것들이 있는 걸까? 제법 흥미로운 주제다. 나는 성큼 걸어서 그 주변으로 갔다. 가까이 가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반짝이던 구름은 다른 여느 구름과 마찬가지로 뽀얬다. 구름을 조금 떼어내자 폭신하던 덩어리는 눈 녹듯 사라졌다. 그럼 반짝이던 건 뭐였을까? 구름을 젖혀 그 너머를 들여다본다. 구름의 산 너머에서 난 반짝였던 것의 정체를 알아냈다. 그곳엔 분홍 하늘을 배경으로 수없이 많은 별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보이는 건, 아, 고양이 인형이다. 얘기를 듣자 하니 별을 따라 이곳까지 왔지만, 고양이 인형의 키로는 구름의 산을 넘어올 수 없었다고 한다. 어쩌면 소녀의 키로도 인형을 구출해내기 어려울 수 있겠다 싶었다.
“도와줘서 고마워!”
겨우 찾아낸 인형을 데리고 소녀를 찾아가자 소녀는 인형을 받아들며 활짝 웃었다. 하늘에 박힌 별 만큼이나 반짝이는 미소다. 품 안에 쏙 들어가는 크기의 고양이 인형은 나에게 악수를 권했다. 뭉툭한 손은 내 손에 비해 너무나 작았지만 나는 그 손을 마주 잡아주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해는 이미 진 지 오래였다. 지금 하늘을 밝히고 있는 것은 달과 수많은 별이었다. 해가 져도 이곳을 여전히 분홍빛으로 찬란하게 빛나게 했다. 영원한 백야의 하늘이었다. 저 멀리서도 별 하나가 빛나고 있었다.
07
온통 컴컴해서 주위가 잘 보이지 않았다. 눈이 어둠에 적응하는 동안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서서히 앞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뚜렷하게 보이는 것은 없었다. 발끝으로 주위를 조금 더듬어보았다. 바닥이 험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나아가려 한 그때였다.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다. 맑고 명랑한… 피아노 소리 같았다. 나는 소리를 지침 삼아 조심스레 나아갔다. 주위가 점점 밝아진다고 느껴질 즈음, 이윽고 작은 공간을 만났다. 암막 커튼 사이로 펼쳐진 그 공간은 공중에 떠 있는 별에서 나오는 빛으로 가득했다. 크고 작은 별은 저마다 다른 색으로 은은히 빛났다. 그 한가운데에 소년은 있었다.
눈을 감은 채 피아노를 연주하는 소년은 한 곡이 끝날 때마다 태어나는 별을 공중으로 올려 보내주고 있었다. 지금 막 올라간 분홍빛별은 천장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태양처럼 이 공간을 비추었다. 계속해서 저마다 다른 노래 속에서 다른 별이 태어난다. 우주의 탄생이라도 보고 있는 기분이다.
내가 이곳에 도달한 뒤로 연주된 세 번째 노래가 끝난 뒤, 나는 박수를 보냈다. 내 박수 소리에 소년이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다지 놀라진 않은 눈치다. 내가 있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걸 수도 있다. 나는 박수 치던 손을 멈추고 소년에게 물었다.
“누구를 위해서 하는 거지?”
“그야 모두를 위해서지.”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다. 소년은 그렇게 말하더니 다음 노래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노래에 맞춰 이번엔 에메랄드처럼 빛나는 작은 별이 천천히 모습을 갖춰갔다. 소년은 아주 소중한 보물이라도 만지듯 별을 손에 올리더니 공중으로 보냈다. 별로 가득해진 천장은 그 자체로 하나의 하늘이 되었다. 아주 아름다운 밤하늘이었다. 서로 다른 모습을 한 별이 은하수를 이루고 있는 것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나는 문득 의문을 느꼈다. 소년이 다음 연주를 시작하기 전의 틈을 타 물었다.
“그럼 너를 위한 별은 누가 만들지?”
소년은 내 말을 조금 의아하게 여겼다. 그런 건 신경 써본 적도 없다는 듯한 눈치다. 하지만 잠시 생각하던 소년은 씩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건 네가 만들어줘라.”
예상치 못한 대답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지금 이건 나에게 한 말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엔 나와 소년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다시 앞을 보자 소년은 곧은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답할 차례였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네.”
아마도 나는 웃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쉽게도 이곳엔 거울이 없어서 내 표정이 어떤지 알 방법은 없다. 만일 웃고 있지 않았다 한대도, 틀림없이 지금 나는 웃고 싶은 기분이었다. 심박 수가 빨라지는 게 느껴진다. 나는 즐거워하고 있었다. 별을 만들어본 적은 없지만, 분명 재밌는 작업이 될 것 같았다. 네가 피아노로 별을 만든다면, 나도 내 방식대로 별을 만들어보겠어. 내 대답에 소년은 만족한 듯이 크게 웃더니 이 말을 끝으로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그럼,”
내일 보자.
08
뭔가 꿈을 꾼 것 같은데, 무슨 꿈이었을까. 좁은 소파에 구겨져 있던 몸을 폈다. 천장을 보고 바로 누우니,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인어공주다. 아니지, 네네다. 흠, 네네는 인어공주처럼 되고 싶어 했으니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옆집에 사는 인어공주는 오늘따라 눈코입이 반대로 보였다. 새로운 기분전환인가?
“언제까지 누워있을 거야. 오늘은 아침 일찍 연습 있다고 했잖아.”
네네는 아직 멍한 얼굴을 한 내 앞에 핸드폰 화면을 들이밀었다. 화면에는 크게 숫자가 떠 있다. 08:45. 아차, 오늘은 9시까지 집합이었는데, 지금 출발한다고 해도 완전히 지각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이제야 얼굴 가득 화가 나 있는 네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한참을 깨운 모양이다. 등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픈 건 기분 탓이라고 하자. 수돗가에서 대충 세수만 하고 짐을 챙기려다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네네, 다리는 괜찮아?”
“이 와중에 그런 소리가…. 쑤시긴 하지만 괜찮아. 이런 건 오히려 움직여야 나아지니까.”
원하던 대답은 아니었지만 뭔가 안심이 됐다. ……난 무슨 대답을 원한 걸까? 네네는 두 다리로 차고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평소와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거참 기묘한 일이다.
몽십야는 훨씬 재밌고 세련된 소설입니다^_^ 저는 어설프게 따라한 거에요.. 되게 짧은 단편 소설이고 잘 찾아보면 웹에서 무료로 읽을 수 있는 곳도 있으니 꼭 한번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