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린과 테스카틀리포카가 감정에 관해 대화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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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람찬 노동 뒤의 한 잔만큼 좋은 것은 없다. 그것은 인간의 규격을 벗어난 서번트에게도 예외가 아닌 듯했다. 칼데아의 어느 구석진 곳. 음주를 즐길 줄 아는 서번트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신세를 진 적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주점. 고풍스러운 글씨로 ‘거미의 소굴’이라고 써진 가게는 익명을 요구하는 아처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칼데아의 수금 기간(이것을 통칭 ‘이벤트’라고 부른다)에는 그만큼 많은 노동력이 투여되어 주점을 찾는 서번트도 많아진다. 주점 주인의 말에 의하면 QP는 받지 않는다지만 믿거나 말거나. 바쁜 이벤트 철에 라스트 오더 시간을 아슬아슬하게 남기고, 그들 또한 이 주점을 찾았다.
“크~ 한 잔 들어가니 살맛 나는걸!”
“호들갑은. 에너미를 잡으러 뛰어다닌 건 나잖아. 넌 따지자면 벤치 담당이었고.”
“나도 뒤에서 놀고만 있는 건 아니랍니다~ 꾸준히 마력을 공급해주는 건 몽마라도 힘든 일이라고. 흑흑, 한동안 편하게 잘 쉬고 있었는데 내 환술이 조금 강해진 뒤로는 하루라도 쉬게 해주는 날이 없어.”
“그 강화 때문에 나도 고생한 건 잊었냐.”
우는 시늉을 하는 멀린을 무시하고 테스카틀리포카는 잔을 비웠다. 징징대고 있는 주제에 실은 하나도 지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는 테스카틀리포카도 사업가 체질이라고는 하지만, 본질은 전투광인 존재였다. 몰아닥치는 배틀은 오히려 환영이었다. 단, 지금 그에게 마음에 걸리는 일이 전혀 없었다면 말이다.
괜찮다. 아무것도 아니야.
“넌 아주 그냥 울고 웃고 잘하는군그래.” 이벤트가 시작되기 직전에 일어난 일을 떠올리며 테스카틀리포카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투는 마치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 같은데?”
“그런 셈이지.”
“음? 혹시 네가 보살펴주고 있는 그 애 얘기야?”
“보살피는 건 아니야. 기회를 제공해주었을 뿐이다.”
“그래?” 순간 멀린은 의심스럽다는 눈길로 쳐다봤지만, 그 이상 언급하는 것은 좋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고 말을 멈췄다. 여기서 좋지 못하다 함은,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상대에게도 마찬가지인 얘기였다. “뭐, 사람은 원래 자기 일일수록 잘 안 보이는 법이니까.”
“하, 너도 나도 사람이라고 부를 수 없는 존재면서 말 한번 잘하는군.”
“그래도 나는 반은 인간의 피가 흐르고 있고, 너도 지금 육신만큼은 인간이니 반은 인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건방진 소리. 오늘은 특별히 봐주마. 지금은 그런 거에 신경 써줄 여유가 없거든.”
경위를 설명하자면 이렇다. 전직 크립터였던 데이비트 젬 보이드는 현재 이문대에서의 싸움을 끝내고 생과 사의 경계가 불분명한 공간, 믹틀람파에서 휴식이라는 명목하에 시간을 보내고 있다. 다르게 표현하면, 놀고 있다. 놀랍게도. 물론 테스카틀리포카의 기준에서 보면 그 휴식이라는 것은 형편없었으며, 그의 성에 차도록 쉴 수 있게 되기까지 칼데아의 시간상 몇 개월은 걸렸다. 자꾸만 어딘가를 싸돌아다니던 데이비트도 지금쯤은 어딘가에 처박혀서 영화나 보고 있을 것이다.
신은 편재한다. 테스카틀리포카는 칼데아의 소환식에 의해 서번트로 소환되어 그 역할을 다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믹틀람파라는 명계를 다스리는 역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문대 고유의 특성에 의해 이승과 명계가 같은 텍스처 위에 존재하게 된 덕분에 지금의 그는 믹틀람파를 지배하는 신으로서의 자아와 칼데아 서번트로서의 자아를 공유하고 있다. 어느 정도의 동기화 과정이 필요하다지만, 그에 관해서는 생략하도록 하겠다.
지금 얘기하려고 하는 것은 믹틀람파에서 있었던 일이다. 칼데아의 이벤트를 앞두고 데이비트의 상황을 확인하러 명계에 모습을 드러낸 테스카틀리포카였다. 딱히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종종 그랬듯이 그는 데이비트를 찾아냈고, 장만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게임 센터의 놀이 기구를 전부 클리어한 것을 보며 칭찬을 해야 할지 잔소리를 해야 할지 고민하던 때였다. 테스카틀리포카가 온 것을 보고 가볍게 인사를 건네던 데이비트의 눈가에서 한줄기 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다음에는 양쪽 눈에서. 예기치 못한 사태에 서로 당황하던 그들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테스카틀리포카가 데이비트의 니트를 잡아끌어 얼굴을 벅벅 문질러줬다는 우스꽝스러운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괜찮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저 생리적인 현상일 뿐이다.”
데이비트는 그렇게 말하며 테스카틀리포카를 돌려보냈다. 칼데아의 마스터를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된다나 뭐라나. 그때 칼데아의 테스카틀리포카는 이미 개념예장을 장착당하는 중이었다는 사실을, 믹틀람파의 테스카틀리포카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믹틀람파에 있는 테스카틀리포카의 의식이 사라지면 그 기억은 고스란히 칼데아 측의 테스카틀리포카로 전해진다. 그리하여 정보를 전달받은 지금의 그는, 가끔은 로봇 같고 가끔은 초딩 같은 예전 마스터의 처음 보는 모습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테스카틀리포카 또한 눈물에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먼지가 들어가서 그렇다느니 하는 이유도 납득하지는 않았다. 어딘가에 고여 있던, 미처 전부 잘라내지 못한 감정이 어떤 것을 기점으로 쏟아져 나온 것이라고 그는 결론지었다.
올바른 배출구를 얻지 못한 감정은 그대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갈 곳을 잃은 채 방치되는 것이다. 방치된 감정은 한계치를 넘어서면 어떤 형태로든 밖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렇다면 왜 하필 지금? 그거야 뭐, 지금은 각박하게 할 일도 없어졌고, 그만큼 여유가 생겼고, 아주 희박한 확률일 수는 있지만, 날것 그대로의 감정을 보여도 상관없을 만한 존재가 생긴 것도 하나의 계기일 수 있다. 단, 아주 만약에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지, 진실은 신도 알지 못하는 영역의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새로운 의문이 생긴다. 데이비트 젬 보이드에게 감정이란 대체 무엇인가. 애당초 감정을 느끼긴 하는 것인가? 그는 1년간 함께 하며 보아온 고용주의 얼굴을 떠올린다. 필요한 말밖에 하지 않으며, 지극히 최소한의 표정 변화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얼굴이다. 하지만 누가 “이 녀석은 감정 같은 걸 느끼지 못하는 놈이야!”라고 말한다면 그는 결코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에 더해서 “그런 말을 하고 싶으면 그 녀석 똥고집이나 받아주고 말해라!”라고 할지도 모른다. 안 하겠지만.
하여튼, 그래서 그는 묻기로 했다. 한량 같아 보이긴 하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관위 적성을 가지고 있으며, 겉으로 드러나는 모든 것이 실은 냉혈한 벌레의 반응일 뿐인 존재에게. 그가 생각하는 감정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지에 관해서.
“내 의견이 도움 된다면 얼마든지 들려주겠지만 글쎄, 아마 그 애랑 내 생각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을 거라고 보는데.”
“그런 건 당연한 거야. 난 그저 네 의견이 궁금한 거다. 그 녀석 의견은 그 녀석한테 물어보면 돼.”
“그러시다면야.”
이미 텅 비어버린 잔의 가장자리를 가볍게 두드리며 멀린은 말했다. 라스트 오더 시간은 이미 지나버렸다. 오늘의 알코올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내 규칙적으로 이어지던 유리잔 소리가 멈춘다. 어디서부터 말을 시작할지 갈피를 잡은 모양이었다.
“우선, 너도 말했다시피 우리는 인간이 아니야. 어떻게 해도 그들과 같은 땅 위에 설 수 없어. 그래도 방법을 찾는다고 한다면 그들을 초월자로 만들 거나, 우리가 평범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정도일까? 하지만 내 의견인데, 그들이 모두 초월자가 되어버리면, 그 세상은 그다지 재미없을 거야.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가지는 한계가 있고, 괴로워하면서도 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에 그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아름다운 것이거든.
그렇다면 우리가 인간처럼 된다? 안타깝게도, 나는 이미 실패했고 그 결과가 지금의 나야. 물론 나로서는 이게 마땅한 결말이라고 생각하지만. 너에게도 인간으로 전락하는 결말은 그다지 기쁜 게 아닐 거라고 보는데?”
테스카틀리포카는 노골적으로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했지만, 멀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런 반응이 나오리라는 걸 멀린은 충분히 예상하였고, 그걸 알면서도 말하는 생물이 멀린이었다. 그리고 멀린의 그런 성질을 테스카틀리포카도 물론 알고 있었다.
“이번엔 그 애 얘기를 해볼까? 내가 그 애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저 멀리서 이 눈으로 ‘본’ 것과 너에게 들은 것이 전부야. 곁에서 직접 경험한 사람과 비교하면 수박 겉핥기에 불과하지. 그 애에 대한 네 인상은 어떻지?”
“웃기는 녀석. 그게 첫인상이다.”
이문대에서의 기억을 회상한다. 원래라면 어둠에 잠겼을 최하층은 온통 빛으로 가득했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도 알 수 있을 정도로는 충분히 눈이 부셨다. 그 한가운데에 있는 것은 구멍이었다. 무엇을 채워 넣어도 모조리 빠져나가 버리는 주제에 끊임없이 세상을 집어삼키는 구멍. 구멍은 감히 신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신은 도전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였다.
“그 녀석이 나에게 처음으로 한 말이 뭔지 아냐? 자기한테 의사소통은 기대하지 말라는 거였어. 나 같은 수다쟁이한테 말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대화가 안 통하는 녀석이었던 건 아니야. 오히려 내가 먼저 말하지 않아도 그 녀석은 내가 원하는 정보를 다 말해줬어. 무서울 정도지.
인간이냐 아니냐로 따진다면, 그건 확실히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어. 하지만 나한테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어떤 시련이 닥치든 굴하지 않고 맞서는 전사를 내가 우대하지 않을 리가 없지.”
“아무렴 그러시겠죠.”라며 맞장구를 치다가 조금 혼쭐이 나버린 멀린의 모습은 그 시간에 그 주점을 방문한 서번트들 사이에서 오래오래 회자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최측근의 의견과 자신이 가진 정보를 조합해서 멀린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나랑 그 애의 결정적인 차이는, 그 애는 어쨌든 인간으로서의 기억이 있다는 거야. 설령 지금 인간이 아닌 무언가가 되었다 해도 말이야.
나는 날 때부터 이런 존재였어.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어떤 것에도 공감하지 못하는, 그럼에도 공존을 포기하지 못한 어리석은 마술사지. 하지만 그 애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평범하게 자라고, 어쩌면 평범한 삶을 살았을 가능성도 있어. 대신 그 경우엔 네 취향에 맞지 않았겠지. 어이쿠, 마지막 말은 생략하는 게 나았으려나? 그래도 부정하지는 않을 거잖아.
나는 말이야, 원래 죄책감 같은 것을 느끼지 않아. 죄책감으로 이어질 감정을 느끼는 기능 자체가 고장 났으니까. 하지만 그래서 편한 것도 있었지. 감정이라는 건 애매하게 존재할 때 오히려 더 힘든 거거든. 차라리 완전한 몽마로 태어났다면 얘기가 달라졌을 수도 있지만, 그건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얘기하도록 하자.
그래서 이름 모를 무언가를 느꼈을 때, 그것이 인간들이 말하는 ‘감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때 나는 처음으로 괴롭다는 게 뭔지 알 수 있었어. 이른바 마음의 고통이라는 거지. 그리고 끝내 나는 이 별의 생명이 끝나는 그 날까지 스스로 갇히는 걸 선택했어. 근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나는 내가 그런 고통을 느낄 수 있었던 것에 만족해. 뭐랄까, 조금은 인간에 가까워진 느낌? 웃기지도 않는 소리지만 아무튼 그래.
조금 돌려서 말하게 되었지만, 결론은 그거야. 살아가는 데 불필요한 것일지라도 나는 인간에게서 비롯되는 별거 아닌 감정 하나하나가 소중하다고 생각해. 그 감정이 모여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것은 곧 이 별의 양식이자 나의 양식이 되지. 그건 감정을 자아내는 인간들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야. 그리고 그건, 우리보다도 인간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그 애라면 더 잘 알고 있을 거야. 그걸 본인이 부정하려 한다 해도 말이야.”
멀린이 손톱으로 빈 유리잔을 가볍게 치자 맑은소리가 퍼진다. 마치 끝을 고하는 종소리 같았다.
“어때, 생각은 좀 정리됐어?”
“…그래. 덕분에.”
“그렇다면 다행이고.”
정리는 되었다. 다만, 그만큼 해야 할 일도 생겨버렸다. 낙원 어딘가를 굴러다니고 있을 면상은 그 일을 반갑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제멋대로인 점으로 따지면 테스카틀리포카도 데이비트에게 지지 않을 것이다. 봐줄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다.
“아 참, 한 가지만 더 말하자면, 우리 같은 존재는 인간의 삶에 너무 많이 개입하면 좋지 않아.”
“신인 나한테 충고하는 거냐?”
“충고보다는 먼 지인으로서 해주는 조언이라고 받아주면 좋겠는걸. 어디까지나 경험을 기반으로 얘기해주는 거니까.”
“그런 거라면 걱정 마라. 난 너처럼 후회할 만한 짓은 하지 않아.”
“그래.” 그렇게 말하고 멀린은 살짝 웃었다. “그랬으면 좋겠다.”
조금은 슬프게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그나저나 우주인가, 나도 거기까진 못 보는데. 역시 지구보다 재밌는 일이 많으려나?”
“아서라. 그런 거 알아서 좋은 거 없어.”
“오, 뭔가 아는 듯한 말투. 다음엔 그쪽이 지구까지 오는 동안의 우주여행 얘기를 들어도 재밌겠는걸. 그렇지, 바텐더 씨?”
“그것도 좋겠지만, 오늘은 슬슬 영업 종료라네, 친구들. 새로운 이야기보따리를 늘어놓을 거라면 장소를 이동해주겠나?”
멋스럽게 콧수염을 기른 노신사는 나긋한 목소리로 테이블을 정리할 것을 청원한다. 다른 장소를 찾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다. 가게를 나서면 테스카틀리포카는 곧장 믹틀람파를 향할 생각이었다. 의식뿐이기는 하지만.
***
칼데아의 테스카틀리포카가 잠들면 믹틀람파의 테스카틀리포카와 의식이 이어진다. 뿌연 안개만 있을 뿐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신은 나타난다. 그곳은 작은 홀이었다. 홀을 둘러싼 벽에는 문이 여러 개 늘어서 있고, 각각의 문은 서로 다른 오락 공간으로 이어진다. 사우나에 게임 센터, 시어터까지, 현대 문물의 오락을 습득하며 테스카틀리포카가 만들어 낸 곳이었다.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갑자기 테스카틀리포카가 나타났지만, 그 앞에 있던 데이비트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언제나 있던 일이었다. 그래서 데이비트는 평소처럼 인사를 건넸으나 안타깝게도 테스카틀리포카는 평소와 같지 않았다. 인사는 받아주지도 않고 그냥 뚫어지라 자신을 보고만 있는 테스카틀리포카에게 기어이 데이비트가 먼저 말을 꺼내고 말았다.
“뭐지? 할 말이라도 있나?”
“데이비트.”
“어.”
“즐겁냐?”
데이비트는 질문의 의도를 가늠하는 듯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칼데아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이벤트라는 것 때문에 고생을 한 건가? 자기가 고생할 동안 나 혼자 놀고 있었던 것에 화풀이라도 할 셈인가? 대충 그 정도의 견적이 나왔다. 하지만 그에 대해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데이비트는 순순히 제 생각을 말했다.
“긍정이나 부정으로만 표현한다면 그렇다는 것에 가깝겠지. 어쨌든 이곳은 필요한 것이 뭐든지 있으니까.”
“그럼,” 예상 범위 내의 답을 듣고, 테스카틀리포카는 질문을 바꿨다. “슬프기도 하냐?”
그 말을 들었을 때 비로소 데이비트는 테스카틀리포카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의도라는 것이 자신에게는 그다지 기껍지 못하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테스카틀리포카, 혹시 저번 일을 신경 쓰는 것이라면 그건 단지 생리적인 반응이었을 뿐인…”
“대답부터 해.”
다소 강압적으로 튀어나온 말에 데이비트는 칼데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 또한 정답이라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식으로 답을 강요하는 것은 의외로 드문 일이었다. 그는 대개 자신의 의견을 존중해주었으니까.
“최소한 내 저장된 기억 내에서는 슬픔을 느낀 적이 없다.”
“그러시다 이거지….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야 이렇게 물어보마. 그건 슬픔을 안 느끼는 거냐, 아니면 못 느끼는 거냐?”
“……대답 여하에 따라 달라지는 게 있나?”
“그건 듣고 나서 생각하도록 하지.”
“성가시군.”
데이비트는 진심으로 귀찮다는 얼굴을 했지만, 테스카틀리포카의 얼굴에도 그 이상의 단호함이 있었다. 이대로 물러날 생각은 없다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이 문답이 얼마나 더 이어질지 생각하니 데이비트는 피로가 느껴질 지경이었다.
“나에게 그런 종류의 감정은 불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무언가를 슬퍼할 시간이 있다면 그 시간에 다른 대책을 강구하는 편이 훨씬 현명해. 그뿐이다.”
그래, 그렇겠지. 너라면 그렇겠지. 그러니 내가 너랑 아직도 이러고 있겠지. 그런 말이 테스카틀리포카의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성가시다니, 누가 누구한테 할 말인지 모르겠다.
“인간들은 보통 무언가를 잃으면 슬퍼한다고 하지.”
테스카틀리포카는 지인과 나눈 대화를 상기했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다.
“너의 서번트로 소환된 내가 소멸했을 때, 넌 슬프다고 느꼈나?”
“…….”
“내가 이곳에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면, 슬퍼할 건가?”
“무슨…”
“언젠가 이곳을 떠나서 나를 잊고, 지금까지의 너를 잊고, 새로운 인간으로 살아가야 하는 때가 오면, 너는 슬퍼할 건가?”
사업을 할 때 거래 상대의 표정을 살피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말로는 미처 표현되지 않은 상대의 진심은 표정에서 읽어내야만 한다. 그리고 테스카틀리포카는 거래에 아주 능숙한 장사꾼이었다. 당연히 표정을 읽는 것에도 익숙하다. 상대가 제아무리 표정 변화 없는 기계 같은 인간이라고 해도 그는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는 것이다. 지금도 그는 눈앞의 얼굴이 아주 살짝 움직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질문에 답하도록 하지.” 평소의 평정을 되찾자마자 데이비트는 말했다. “네가 소멸했을 때, 그걸 슬픔이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다만 나로서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어. 그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상하며 도착했음에도 실제로 마주하는 건 별개의 일이더군. 그 1년간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너에게 의지했던 모양이야.
만약 너의 목적이 나에게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이라면, 그렇지… 더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고, 이곳에서도 쫓아낸다면, 나는 분명 감정이라고 부를 만한 무언가를 느낄 거로 생각한다. 답이 되었나?”
일목요연한 정리였다. 더 반박할 거리도 생각나지 않는다. 이 정도면 재수 없을 지경이다. 대화가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데이비트는 자세를 고쳐잡고 떠날 기색을 보였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보마. 다음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아이스크림을 가지러 나왔을 뿐이었거든.”
그러더니 그새 매정하게 몸을 돌려버린다. 시어터 룸은 정면에 보이는 문을 통해 들어가면 나온다. 다음 영화가 시작하기까지 시간은 아직 남았을 것이다. 아직 몇 마디 더 주고받을 시간은 있다는 뜻이다. “지인 녀석의 말에 의하면 긍정적인 감정이 부정적인 감정을 이기기 위해서는 몇 배의 노력이 필요하다더군. 그 녀석 입장에선 악몽 쪽이 훨씬 영양가가 높다고 해.” 테스카틀리포카는 뒤통수에 대고 일방적으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네가 언젠가 이곳을 떠나는 것은 이미 확정된 미래다. 이곳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정해진 규칙이야. 예외는 없어. 영원한 휴식 같은 건 이 세상에서 혼 자체가 사라졌을 때나 생각하라고 해.
그리고 그때가 왔을 때 네가 슬픔을 느낀다면, 나로서는 바라던 바다. 대신에 나는 너에게 그 이상의 기쁨을 강요할 거다. 기뻐하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그리고 즐겨라. 그게 내가 너에게 요구하는 시련이다.”
어느새 걸음을 멈추고 듣고만 있던 데이비트는 고개를 돌려 테스카틀리포카를 보고 말했다. 여전히 평온한 목소리에, 평온한 표정이었다.
“확실히 그건… 나에겐 별을 파괴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야.”
“그러니까 시련이 되는 거지. 거저 얻기만 하면 재미없는 거야. 열심히 해봐라. 영화 잘 보고.”
할 말은 끝났다. 다소 진부한 얘기가 되었지만, 오늘은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대충 손을 흔들어주고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테스카틀리포카.”
사람 귀찮게 하는 철부지가 불러세우지만 않았어도 멋있게 퇴장할 좋은 기회였다.
“영화, 같이 보는 게 아니었나?”
이 자식, 이럴 땐 부르지 말고 보내주는 게 좋다고 배운 거 아니었나? 눈치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헷갈리고 만다. 데이비트는 요란한 그림이 그려진 아이스크림 통을 들고 가만히 서 있었다. 같이 들어가지 않으면 계속 그러고 서 있을 게 뻔했다. 하여간 그놈의 고집.
너무 많이 개입하면 좋지 않아.
몽마 녀석, 괜한 말이나 하고. 역시 다음에 보면 한 대 쥐어박아 줘야겠다. 일단, 영화 하나만 보고 나서.
초반에 나오는 환술 어쩌구는 9주년 멀린 강화퀘 메타 발언입니다. 고난이도 요원이었던 멀린은 이제 주회에서도 신이 되어버렸습니다. 강화퀘 몹으로 등장해주신 전능신에게도 감사.
제가 멀린을 참 오래 좋아했는데 (현재 120렙 보7임. 곧 우리 칼데아의 그랜드 캐스터가 될 예정.) 너무 넓은 시야로 인해 고립감을 느끼고, 인간의 감정을 흉내 낼 뿐이지 그걸 느낄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점 때문에 좋아하는 거라서 데이비트랑 엮어서 얘기해보고 싶었어요.
마침 멀린이랑 테스카틀리포카가 세두사 탑 이벤에서도 같이 나오고, 강화퀘에서도 신세 지고 있는 걸 보니 접점이 없지는 않아 보여서 냅다 친구로 만들었습니다. 이러다 나중에 정말 둘이 대화하는 장면 나오면 어쩌지? 그건 그때 생각하는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