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해표류기

다소 우울한 내용이라.. 감정에 잘 휩쓸린다 하는 분은 주의해서 봐주셨으면 합니다. 일부 과격한 표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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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쉰다. 그런 당연한 행위를 의식해본 적 있는가? 어쩌면 지금 이 말을 본 순간 숨 쉬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을 수 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당연한 행위. 하지만 심장 박동과 달리 머리로 인식하는 순간 의도적으로 유지해야만 이어지는 행위. 그것이 호흡이다.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선 수의근에 관한 얘기부터 시작해야 할 테지만, 지금은 넘어가도록 하자. 어쨌든 지금 할 이야기의 핵심은 그게 아니니까. 이 이야기는, 내가 살아가는 데 필요했던 무언가를 깨달으면서 시작되는 상실의 이야기다.
 
지금 생각해보면 징조는 꽤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 같다. 그날도 우리는 적절한 침묵을 유지하며 차고에서 각자의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돌아오는 네네로봇의 점검일. 언제부턴가 우리 사이에 생긴 암묵적인 규칙. 점검일이 되면 나는 정해진 순서대로 네네로봇을 확인하고, 점검이 끝나길 기다리는 동안 네네는 조용히 자기 일을 한다. 그날도 평소와 같았다. 소파에 기댄 자세가 불편할 법도 한데, 네네는 몇 시간이고 꼼짝도 안 하며 게임에 집중했다. 하나로 적당히 모아 묶은 머리카락, 조금은 과하게 구부러진 목과 등, 민소매에서 뻗어 나오는 가느다란 팔과 게임 진행에 따라 바쁘게 움직이는 손, 헐거운 반바지와 얌전히 오므리고 앉은 다리 위로 솟아오른 동그란 무릎.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네네가 낯선 사람처럼 느껴지는 자신을 발견하고, 나는 애써 태연히 네네를 불렀다. 네네, 끝났어.
 
쉴 줄 모르던 손이 멈추고 네네가 나를 본다. 거기서 마주한 것은 앳된 여자아이의 얼굴이었다. 10년의 세월을 거쳐 여전히 내 곁에 있는 너의 모습이었다. 잠시, 아주 잠시 네네로봇과 나를 번갈아 본 네네가 이쪽으로 다가온다. 점검하는 동안 잠들어 있던 네네로봇이 눈을 뜨고 인사를 한다. 안녕히 주무셨나요? 그 목소리를 들은 네네가 대답한다. 응, 잘 잤니?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는 자장가처럼 들린다. 따스한 목소리에 온몸을 지배하던 긴장이 누그러진다. 하지만 그다음 순간, 나는 조금 전의 미시감은 기분 탓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고마워, 루이. 그렇게 말하며 네네가 웃었다. 평소와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없어야 했다.
 
그날 네네가 돌아간 뒤, 나는 작업을 더 이어갈 수 없었다. 매일 같이 손에 쥐던 연장이 불편하게 느껴진 건 왜였을까. 지금의 나라면 그 이유를 알겠지만, 그때의 나는 영문도 모른 채 하루를 끝낼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일이 잘 풀릴 수는 없는 법이지. 가끔은 이런 날도 있는 법이지. 그 정도로 끝난 일이었다. 끝났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뒤로도 비슷한 일을 몇 차례나 겪어야 했고, 그때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다가오는 감정을 외면했다.
 
그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은 그날로부터 한 달은 지났을 무렵이다.
 
꿈은 언제나 어딘지 알 수 없는 장소에 서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눈앞이 온통 하얬던 것 같기도 하고, 새까매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위아래도 구분하기 어려운 감각 속에서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내 앞에는 누군가가 서 있다. 나는 그것이 누군지 처음에는 인지하지 못한다. 사람이라는 것만 알 수 있다. 그리고 문득 나는 깨닫는다. 그건 네네였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네네라고 인식하는 순간, 사람의 형체는 온데간데없어지고, 네네의 모습을 하고 있던 누군가는 물이 되어 쏟아져 내린다. 물은 이윽고 바다가 되고, 나는 점차 높아져 가는 수면을 바라보며 꿈에서 깨어난다. 그런 꿈을 꾼 것도, 이제 열 번을 넘어가고 있었다.
 
하루가 지날수록 물은 점점 높게 차오른다. 언젠가 이 수면이 내 키를 넘어서면, 나는 물에 잠겨 숨이 멎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너에게 가라앉아 죽는 것이겠구나. 손으로 떠 올린 물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렀을 때 문득 깨달았다.
 
나는 너에게 가라앉고 있는 것이었다. 위에서도 한 말이 아니냐고 한다면, 아니다. 조금 다르다. 가라앉는다는 표현이 누군가에게는 문학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과거의 나도 마땅히 그렇게 여겼을 것이다. 지금의 나도 그렇게 느낄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안타깝게도 어떤 희극은 그것의 당사자가 되는 순간 비극이 되기도 한다.
 
왜 알지 못했을까? 이미 너와 함께 한 시간이 너무나 길었기 때문에? 너와 함께 있는 것이 나에겐 너무 당연했기 때문에? 너에게 그 이상의 감정을 가진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한 걸까? 하지만 이미 깨달아버린 것은 돌이킬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너에게 가라앉고 있다.
 
감정은 나날이 부풀어 오른다. 나는 조금씩 물에 잠겨간다. 사랑에 빠진다는 표현을 처음 쓴 사람은 누구일까. 정말이지 잔인한 말이다. 한 번 떨어지기 시작한 것은 가속되며 끝내 깊은 밑바닥에 부딪히게 된다. 궤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힘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내가 이곳에서 벗어날 방법은 무엇일까. 너는 내가 어떻게 했으면 하지? 나는 꿈속에서 네가 아닌 너에게 묻는다. 아직 바다로 녹아내리지 않은 너는 시큰둥한 얼굴로 말한다. 나를 받아들여. 그리고 융해. 그러고 보면 꿈속의 네가 말하는 것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너를 받아들이는 것, 깨달아버린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는 쉬운 일이다. 지금이라도 옆집으로 달려가 문을 두드리고, 문을 열고 나온 여자아이에게 마음을 전하면 된다. 사실대로 말하면 어떻게 될지 나는 알고 있다. 너는 상냥하니까, 나를 받아줄 것이다. 설령 너와 내가 같은 감정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나는 그걸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의 이기심을 너에게 밀어붙이는 짓을 용서할 수 없었다. 사랑이라는 건 지극히 일방적이고 이기적인 감정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결코 서로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없는 법인데 그런데도 멋대로 기대해버리고 만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감정인가. 나는 너에게 같은 감정을 바라선 안 된다. 아파하는 것은 나 혼자로 충분하다. 너는 나와 같은 고통을 느끼지 않길 간절히 바란다.
 
밤이 찾아온다. 오늘도 그곳에 네가 있다. 어느새 턱 끝까지 차올라버린 네가 나에게 밀려온다. 나는 너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너에게 몸을 맡긴다. 몸이 붕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이곳은 이미 심해다. 나는 너라는 바다에 가라앉고 있다. 크게 숨을 들이쉬고, 다시 내쉰다. 물은 몸 안으로 흘러들어오지 않는다. 아주 서서히 느려지는 호흡은 이윽고 완전히 멈춰버린다.
 
나는 네 안에 가라앉아 숨을 포기한다. 나는 나를 죽인다. 너를 사랑하게 되어버린 나를 죽인다.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아버린 나를 죽인다.
 
안녕, 잘 가렴. 세상에 태어나지 못한 이름 없는 감정아. 언젠가 네가 다시 세상에 태어났을 때, 그곳은 볕이 잘 드는 해변이길 바랄게.
 
깊은 바닷속 밑바닥에 빛은 닿지 않는다. 짙어지는 어둠 속에서 나는 이 꿈이 끝나길 기다린다. 그리고 아침은 찾아온다.
 
 
 
***
 
“루이, 무슨 일 있어?”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침, 네네가 묻는다.
 
“아니, 별일 없는데, 왜?”
“왠지 피곤해 보여서. 괜찮다면 다행인데….”
 
내 대답을 들은 뒤에도 네네는 석연찮은 반응을 보였다. 혹여나 내 태도에서 티가 났는지 싶어, 멀리 보이는 건물의 유리창으로 그럴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확인한다. 아무 문제 없었다.
 
네가 꿈에 나타나는 일 또한, 더는 없었다.
 
 
 

11-16
yunico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