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바다

올리브님(@7_7v_v) 썰을 기반으로 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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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이 잠에 드는 계절이었다. 지난주보다 따뜻해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그늘진 곳에는 쌓인 눈이 녹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옷자락을 여미며 걸어가는 모습을 창문 너머로 보고 있었다. 난방이 잘 유지된 방안은 추위에 떠는 것이 남의 일처럼 여겨지게 했다. 따뜻한 공기에 노곤해져 졸음이 몰려오는 눈으로 나란히 걸어가는 무리를 눈으로만 좇았다. 무슨 즐거운 일이라도 있는지 하나 같이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방안까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산책이라도 나가볼까. 머릿속으로만 막연히 생각하던 게 입 밖으로 흘러나온 모양이다. 새어 나온 입김으로 창문에는 뽀얗게 김이 서렸다. 그 위에 낙서해 보기도 전에 창문은 다시 투명해져 눈으로 하얘진 세상을 비췄다.

 

바다 가고 싶다. 그건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놓칠 만큼 작은 소리였다. 밖에서 들려온 줄 알았던 그것이 방 한구석에 앉아있는 아이에게서 나온 목소리라는 것을 알아채기까지는 수 초의 시간이 걸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 침대 위를 보았다. 그 아이, 네네는 여전히 웅크리고 앉아 손만 바삐 움직이며 게임기를 조작하고 있었다. 내 말에 대꾸를 한 것인지 잠시 고민했지만 그 뒤로 네네에게서 더 나오는 말은 없었다.

 

네네가 먼저 원하는 것을 말한 게 얼마 만이었더라. 실은 내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네네는 줄곧 신호를 보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에겐 텔레파시를 수신할 초능력도, 로봇도 갖춰지지 않았다. 만일 내가 우주인이었다면 더 빨리 알아차릴 수 있었을까. 하여튼, 네네의 신호를 귀로 들은 것은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이는 아주 큰 수확이었다. 인간이 욕구를 표현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나는 그것을 지난 몇 달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어떤 말도 안 되는 것이든 좋았다. 무엇이든 좋으니 네네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싶었다. 원하는 것이 없다면, 차라리 싫다는 말이라도 해주길 바랐다. 먹고 싶은 거 없어? 갖고 싶은 건? 하고 싶은 건 없어? 하지만 언제나 돌아온 것은 좌우로 젓는 고갯짓뿐이었다. 나는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이 기회를 잡아야 했다.

 

그럼 가자. 그제야 네네는 게임기 화면에서 눈을 떼고 나를 보았다. 가슴이 저렸다. 예전에는 조금 더, 네네의 생각을 알 수 있었던 것 같은데. 말없이 나를 보는 눈동자 속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조용히 게임기를 끄는 손짓만이 내 말에 동의하였음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전차를 타고 달려 바닷가에 도착했다. 시부야는 도심 한복판에 위치하여 쉽게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가장 가까운 바다를 찾아온 곳이 이곳이었다. 성수기에는 인산인해를 이루었을 해변은 적막함이 흐르고, 빙수며 오징어구이 따위를 팔았을 노점은 문을 연 곳을 찾기 힘들었다. 들려오는 것은 모래사장을 쓸어내리는 파도 소리뿐이었고, 우리 둘을 제외하곤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다.

 

너무 멀리 가지는 마. . 대화는 그게 전부였다. 새하얀 모래사장 위로 네네는 아주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리고 세 번째 걸음을 내딛으려 한 순간 세차게 불어온 바람은 흐려진 정신이 맑게 개게 했다. 바람에 나부끼는 네네의 머리칼은 물결처럼 굽이쳐서 마치 바닷속을 헤엄치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네네는 바람을 피하려는 듯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누르며 뒤를 돌았다. 고개를 돌린 네네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이번에야말로 그 눈동자 속에서 끝없는 슬픔을 읽어낼 수 있었다. 금방이라도 바람을 타고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조급해진 마음은 우두커니 서 있던 다리를 움직이게 했다. 오랜만에 끌어안은 작은 몸은 여전히 앙상해서,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모래처럼 바스러질 것 같았다. 그 눈동자를 다시 마주할 자신이 없었던 나는 팔에 조금 힘을 뺀 뒤에도 마른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해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우리가 특별히 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해변에 가만히 앉아 바다를 보기만 할 뿐이었지만 이유 모를 탈력감은 견딜 수 없는 졸음을 몰고 왔다. 우리는 돌아가는 전차 속에서 나란히 고개를 떨구며 서로에게 기대었다. 몽롱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나는 무릎에 얌전히 놓인 옆자리의 손을 꼭 붙잡았다. 혹시라도 다시 눈을 떴을 때 사라졌지 않도록, 지금 이 순간이 꿈이 아니길 바라면서.

 

 

 

12-09
yunicorn